머리말

우리는 문학으로 같은 통점이 된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통점을 지니고 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 자리에서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 무뚝뚝하게 걸어가는 사람도 있다. 별거 아니라는 듯 바지를 걷어 상처를 보여주는 사람이 있고, 상처를 들키고 싶지 않아 기다란 치마 속으로 무릎을 감추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 그걸 차이점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우는 사람도, 울지 않는 사람도, 다친 사람들의 무릎에선 빨간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느끼는 아픔의 크기가 다를지언정 피가 흐르면 모두들 그걸 상처라고 부른다는 것을. 상처를 치료받기 위해서는 언젠가 다른 누군가에게 무릎을 꺼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만약 내가 먼저 일어나 있는 사람이라면, 아직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순 없는 걸까. 우리는 언제까지 차이점이라는 안전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아픔을 관망해야 하는 걸까.

망설임 끝에 왔던 길을 돌아가 보면 넘어진 사람은 이미 사라져 없고 대신 그 자리엔 늘 내가 주저앉아 있다. 괜찮니? 내가 나한테 손을 내민다. 그제야 그곳에 남아 오랫동안 울고 있던 사람의 기분을 알 것만 같다.

공통점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서로를 구분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차이점을 가졌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인해 다시 하나가 된다.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이 타인의 아픔을 체험해보는 일이라는 건, 문학은 사람들이 지닌 서로 다른 통점을 모두 같은 통점으로 만들어주는 일이라는 것. 우리의 글을 읽게 될 누군가도 여기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 문학을 함께 읽고 쓰는 사람들이 있는 한 공통점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함께하는 사람들

기획·운영 : 신헤아림, 조온윤, 윤소현

창작 : 김나연, 김도경, 김병관, 김원경, 김현진, 이기현, 이서영

좋은 시 보관소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날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지니며
욕심도 없이
화내는 법도 없이
언제나 조용히 미소 짓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약간의 채소를 먹으며
세상 모든 일을
제 몫을 셈하지 않고
잘 보고 듣고 헤아려
그리하여 잊지 않고
들판 솔숲 그늘 아래
작은 초가지붕 오두막에 몸을 누이며
동쪽에 아픈 아이 있으면
가서 보살펴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짐을 지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무서울 것 없으니 괜찮다 하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짓이니 그만두라 하고
가뭄 든 때에는 눈물 흘리고
추위 온 여름에는 버둥버둥 걸으며
모두에게 바보라 불리고
칭찬도 받지 않고
고통도 주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네

청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 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조각처럼

노크하지 말고 / 아틸라 요제프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노크하지 말고 들어와요
하지만 그전에 잘 생각해요
밀짚으로 엮은 매트리스를 침대로 주리니
신음하듯 부스럭거리는 매트리스를

생수로 주전자를 채우고
가실 때는 신을 닦아드리지요
여기서는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리니
편안히 구부리고 옷을 기울 수 있으리오

침묵이 너무 무거워지면 내가 말을 하고
피곤하면 하나뿐인 내 의자를 드리지요
방 안이 더우면 단추를 풀고 옷을 느슨하게 풀어요
배고프면 깨끗한 종이를 접시로 써요
먹을 것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있다면
내 것도 조금 남겨 주오 ― 나는 늘 배가 고프다오

내가 당신을 사랑하면 노크하지 말고 들어와요
하지만 그전에 잘 생각해요
오래 떨어져 있으면 아플 테니까요

거울 /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지구의 끝 / 신해욱


건조한 기억은 열매와 같았다.

나는 나에게서
그것이 뚝 뚝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수소를 가득 채운 것처럼
머리가 가벼워지고 있었다.

*

내 목을 꼭 움켜잡았다.

나는 지구를 떠날 수는 없었다.

목성에서 물이 떨어지는 속도
이름 없는 혹성에 대한 자유 연구
그런 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상상력이 너무 빈곤해서
손가락을 잘라도 가루가 날릴 것이다.

어떤 물에도 녹지 않을 것이다.

*

나는 그림자만 키가 큰다.

그림자에게는
비가 오고
어제도 있다.

내가 목을 움켜잡고 있는 동안
따로 또 같이.

우리들의 진화 / 이근화


감자와 고구마의 영양 성분은 놀랍다
나는 섭취한 대부분의 영양을 발로 소비한다
내 두 발을 사랑해

열 개의 손가락을 오래 사랑했다
고부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멈추지 않고 자라나는

내 몸의 물은 내 몸으로부터 빠져나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우리는 길을 똑바로 걸어 되돌아왔다
사라지는 골목을 사랑해
오래 사랑했다

*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기(機)의 진화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되어간다

긴 손가락으로 긴 손가락을 잡으면
더 큰 동그라미들이 태어날까
더 많이 태어났다 오래 죽어갈 수 있을까

천장 위에 쌓이는 먼지들의 고고한 자세로
우리는 숨을 고르고 다시 손을 모은다
내 몸을 엉망으로 기억하는 이불에 대해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기로 한다

*

우리는 일어나서 웃었다 나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
외로운 자들이 자꾸 명랑해지는 이유를 하루 종일 생각했다
말이 없고 불만이 없는 자들이 사라질 미래를 향해 걸었다

저 나무를 들어 올리면 몇 채의 집이 쓰러질까
저 산을 뽑아낼 아무런 상상도 하지 않았다

직선으로 내리는 비는 본 적이 없다
동네를 두 바퀴 세 바퀴 돌고
우리는 안전하게 다시 웃었다

어깨동무

조온윤은 정현주박준기, 그리고 새로운 질서와 함께합니다.

새로운 과제

시의 토대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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